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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인물

조선의 간신들

조선시대 간신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있다.  사육실의 변절자 김질, 단종 폐위의 계유정난 설계자 한명회, 조선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 남이장군의 고변자 유자광, 기축옥사 모반을 고변한 정여립, 임경업장군을 모반으로 죽인 김질의 5대손 김자점,  매국노 이완용 등 드라마와 백과사전을 통해 살펴보면서 역시 조선의 세조, 연산군, 광해군, 선조, 인조, 고종 등 난세시대에는 나만 잘살고 니들은 다 죽어도 되는 XX같은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이 나라가 어쩌고, 백성이 저쩌고 하면서 역사랍시고 기어 나오는구나!

김질

조선 전기의 문신. 1422 ~ 1478, 1456년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의 거사를 꾀하다가,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하여,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본관 안동. 자 가안(). 호 쌍곡(). 시호 문정(). 개국공신 사형()의 증손자. 음보로 충의위()에 속하여 부사직()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를 청원,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 주부에 제수된 뒤 사간원우정 ·병조좌랑을 지냈다. 그 무렵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가 되고, 다음해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의 거사를 꾀하였다.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그 공로로 군기감판사()가 되고, 이어 좌익공신() 3등에 책록, 상락군()으로 봉하여졌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1468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 준()을 제거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고, 1474년 우의정으로 주문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한명회

한명회(, 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명회는 또한 두 딸을 예종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만년에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다. 한명회는 과연 말년을 갈매기와 함께 보내려고 했을까? [네이버 지식백과]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나이에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즈음 왕의 숙부 수양대군은 약해진 왕권을 회복한다는 명분 하에 비밀리에 거사를 모의하였다. 수양대군은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몰래 모았는데, 그 가운데 자원해서 수양대군에게 접근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한명회였다.

“지금 임금은 어린데, 범 같은 대군들이 도사리고 있어 백성들의 소문이 자못 어지러운 이때에 큰일을 꾀하시는 분들이 어찌 이리 한가하시오. 들으니 수양대군은 위대하시고 매우 용맹스럽다기에 내 뜻한 바 있어 찾아왔거니와, 우리 함께 그를 추대하고 대사를 도모하여 명성을 떨쳐 보지 않으시렵니까.” 한명회가 친구 권람에게 한 말로, 이를 계기로 권람의 추천을 받아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대면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하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이로다!”라고 후대하였다. 자방이란 중국 한나라 때의 책사 장량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양대군 측의 모든 계책은 한명회로부터 나왔다.

한 번은 수양대군 측에 쓸 만한 무사들이 없음을 보고는 수양대군에게 비밀히 말하여 무사들과 결탁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그 방법을 묻자, 한명회는, “이것은 가장 쉽습니다. 활쏘기 연습이란 명분으로 술과 안주를 많이 장만해서 매일 모화관()과 훈련원으로 나가 활쏘기를 하고 나서, 무사들을 먹이면 다 사귀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한명회는 수양대군 측의 일등 모사였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측 세력들은 이후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대신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한명회가 중심이 되었으며, 그는 세조 즉위 후에도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1456년(세조 2년)에 발생한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다. 한명회의 끊임없는 감시의 결과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단종 추종세력은 거의 약화되었다.

이러는 와중에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난공신에, 사육신 사건 처리 뒤에는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이어 1468년(예종 1년)에 발생한 남이의 옥사 처리 뒤에는 익대공신에, 그리고 성종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는 등 채 20여 년도 안 되는 사이에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다.그것도 모두 1등공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절친한 친구이면서 혼맥으로 연결된 권람이나 신숙주 등 역시 함께 공신에 책록되었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역사상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군의 세력을 훈구세력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의 생애가 반드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신숙주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석방되는 일이 있었다. 한명회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신숙주∙한명회 등과 글로써 통했다는 자백이 나온 것이다. 이때 한명회는 반역자와 연루설이 제기되었기에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사직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 세조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그 뒤 한명회는 그야말로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두 딸은 예종비인 장순왕후(), 성종비인 공혜왕후()이다. 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좌승지·이조판서로 승진하고 상당군()에 봉해졌다. 61년(세조 7) 부원군에 진봉()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66년 영의정에 올랐다. 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교()에 따라 원상()으로서 서정()을 처결하였고,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71년(성종 2) 성종 즉위에 협찬한 공으로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같은해 영춘추관사()로서 최항(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84년(성종 15) 궤장을 하사받았다. 세조가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총애 받은 1급 참모로, 4차에 걸친 1등 공신에 예종·성종의 장인[]으로서 요직을 두루 역임하여 훈구파()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죽은 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사()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었다가 신원()되었다.

 

임사홍

임사홍(, 1445~1506)이 간흉(: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으로 지목되었음과 함께 간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준엄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흔히 1504년 갑자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임사홍은 두 아들과 함께 부마(: 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처형을 당했고,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이의()이다.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이자, 효령대군(, 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의 사위였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여 풍성군()에 올랐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가 되게 했다. 첫째 아들 임광재()는 예종(, 조선 제8대 왕)의 딸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어 풍천위()가 되었고, 셋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 조선 제9대 왕)의 딸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풍원위()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구미에 맞는 측근이 되어 전대미문의 관직에 올랐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채홍사(使)로 임명된 것이다. 처음에 임사홍은 기생을 뽑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여러 사류()에게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 년에, 내가 특별히 들어 써서 마치 물에서 구원하고 불에서 건져 준 것과 같으니,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어야 하거늘, 만약 두터운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임금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참으로 소인이다.” 10)하면서 임사홍을 압박했다. 결국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 기생)과 흥청(: 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던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권력의 최측근 임사홍은 체포된 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실록에서 대간(: 매우 간사함)ㆍ대탐(: 매우 탐학함)ㆍ대폭(: 매우 포악함)ㆍ대사(:큰 사기꾼)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전형적인 간신의 최후였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 의금부에서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 관대한 은전)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적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11) 자신이 주도했던 부관참시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 것이다. 적몰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는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임사홍은 권력을 위해 뭇 선비와 아들까지 죽였지만, 권력의 부메랑은 임사홍 자신의 처형으로 날아왔다. 그에게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라는 불명예가 더해졌고, 이 낙인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임숭재

임숭재[ ] 미상 ~ 1505년(연산군 11)  조선전기 장악원 제조, 채홍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간신. 본관은 풍천(). 아버지는 임사홍()이며, 성종의 사위이다.[네이버 지식백과]

1491년(성종 22) 휘숙옹주(: 성종의 )와 혼인, 풍원위()에 봉해졌다.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임사홍보다 더하였으며 충신들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았다.

창덕궁 곁에 저택을 두고 왕과 음란행위를 같이 하는 등 비행을 일삼았고, 미복()으로 궁중을 출입하였다. 가무에 능하여, 1504년(연산군 10) 장악원제조(調)가 되었는데 특히 처용무()를 잘 추었다.

1505년 채홍준사(駿使)에 임명, 경상도의 미녀·준마(駿)를 구할 때 도내 사람들이 놀라 모두 피신하였고, 그가 수레를 타고 다닐 때에는 마치 왕의 행차와 같을 정도였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상경할 때에는 연산군이 승지를 시켜 강 가에서 맞게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일찍이 휘숙옹주와 혼인한 날 밤에 집에 불이 나 옹주가 인근 민가에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사신()은 “임사홍은 소인()으로서 불의로 부귀하게 되었는데 복이 지나쳐 재앙이 생겼다.”고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되었다.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3. 남한산성

(출처 경기일보 2020. 05.18)

 

역사를 한두 사건이나 한두 인물의 이야기로 단순화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있는 법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역시 병자호란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시 중국 대륙은 농경국가인 한족의 명(明)에서 유목민족인 여진의 청(淸)으로 주인이 바뀌고, 일본은 140년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 정치가 시작한 직후였다. 조선은 건국 200년을 지나면서 사화와 당쟁, 잦은 반정과 역모 조작 사건,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중국, 일본은 청년 국가인데, 조선만 말기 국가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지도자의 차이도 컸다. 청나라는 태조 누루하치, 태종 홍타이지, 섭정 도르곤 3대에 걸쳐 영웅이 집권하지만, 조선은 무능할수록 왕위에 더 가까웠다. 연산부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를 거쳐 인조까지 광해군 외에는 대부분 방탕하거나 병약했고, 아니면 의심증후군에 우유부단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역량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황위를 계승한 명민한 황제였지만, 인조 이종(李倧)은 서인의 반란에 얹혀 왕위에 오른 발언권 없는 우둔한 왕이었다. 국가와 지도자 모두 뒤지니 전쟁 전에 이미 승부가 나 있었다.

홍타이지는 중원 전쟁을 지원할 3만 병력과 전마 3천 필 요구가 거부당하자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군은 한양으로 직진하는 청군의 후미를 교란하지도 않았고, 조선 조정은 강화 몽진도 늦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은 남한산성에 비축된 양식이 바닥난 50일 만이었다. 한반도의 대륙군에 대한 항쟁 기간은 점점 짧아진다. 기원전 2세기 고조선은 한나라군에 2년을 버티고, 고구려는 수, 당과 200년 간 항쟁해 대부분 이겼고, 7세기 백제는 임존성을 근거로 4년간 부흥 운동을 펼쳤다. 8세기 통일신라는 당나라 10만 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문약하다고 평가된 고려조차 세계제국 몽골에 근 20여 년을 버텼는데, 전주 이씨의 17세기 조선은 변방국 청나라군에 두 달 못 돼 항복했다.

아들 소현세자를 의심한 인조
소설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명칭이 무엇이든 모든 드라마는 위기 상황에서 인간 군상이 드러내는 갈등 구조를 묘사함으로써 성립한다. 갈등이 심각할수록 극적 효과는 크다. 병자호란은 드라마 배경으로 최고다. 떠오르는 청과 기울어가는 명, 젊고 기민한 청과 늙고 느린 조선의 대비는 구조적 모순이다. 발언권 약한 왕과 목소리 높은 서인 조정, 주전파와 주화파는 조선 갈등의 큰 틀이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될수록 간신의 발호와 영웅의 비운은 더더욱 대비되니, 조선의 갈등은 더욱 복잡하면서 구체화된다. 무능한 부왕 인조와 명석한 장남 소현세자, 요사스런 총희(寵姬) 조 소용과 충직하나 경계 받는 세자빈 강빈, 중앙의 권간(權奸) 김자점 대 변방의 용장(勇將) 임경업. 그러나 조선은 갈등조차 모두 국운을 해치는 방향으로 해소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영민해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했고, 후궁 조 숙원(趙淑媛)은 이를 부추겨 소현세자 부부와 아들 삼형제를 모두 죽인다. 얼마 후에는 중앙의 권간 김자점이 변방의 용장 임경업을 죽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안타까운 이야기는 소설 ‘임경업전’으로 재구성됐다. 김자점과 임경업의 대비는, 중국 송나라의 간신 진회(秦檜)와 충신 악비(岳飛) 장군을 연상케 한다. 악비는 오늘날에도 관우와 함께 중국 민중의 절대적 숭앙을 받지만, 오늘날 조선조 임경업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너무나 허전하다.


그나마 효종 즉위후 김자점과 조 숙원이 역모를 꾀하다 죽는 반전이 있어 최소한의 위로를 준다. 호란 당시 주전파의 핵심 김상헌도 안동 김씨요, 청군의 밀정 노릇을 한 권간 김자점도 안동 김씨다. 같은 뿌리에서 나서 자랐다 해서 같은 줄기나 잎은 아니다.

 

유자광

유자광(, 세종 21〔1439〕∼중종 7〔1512〕)은 한국사에서 매우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어떤 이미지는 억지로 꾸며내거나 무턱대고 주입한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인상’이라는 바로 그 의미가 가리키듯, 실제와 일정한―또는 상당한―거리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마 유자광에 관련된 이미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될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유자광의 다양한 면모를 온전히 서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의 판단보다는 그에게 주어진 객관적 조건과 시대적 상황을 중시하면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유자광은 경주부윤을 역임한 유규(, ?~1473)의 서자로 세종 21년(1439)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후()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었다. 먼저 조부 유두명()은 대언(, 정3품)을 지냈으며 증조는 유언()이다. 아버지 유규는 음서로 입사한 뒤 무과에 급제(세종 8년〔1426〕)해 단종 때 사헌부 장령(정4품)ㆍ집의(종3품)를 거쳐 세조 때 형조ㆍ호조참의(정3품)ㆍ황해도 관찰사ㆍ경주부윤(이상 종2품) 등을 역임했다. 중앙의 핵심적 요직은 아니지만 상당히 비중 있는 관직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정숙()이라는 시호가 보여주듯 그는 중후한 인품과 청렴을 높이 평가받았다.

첫 머리에서 유자광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체제와 밀착되는 협력의 길을 실천했고, 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협력 중에서 가장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은 고변일 것이다. 변란을 고발하는 그 일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를 사전에 진압하는 매우 훌륭한 공헌이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예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자신의 첫 고변을 감행했다. 그것은 유명한 남이(南怡, 1441~1468)의 모반이다. 유자광은 남이가 한명회()ㆍ김국광()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변했고, 짧은 심문을 거쳐 남이를 비롯해 강순()ㆍ조경치()ㆍ변영수() 등이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당연히 크게 포상되었다. 우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책봉되었던 적개공신에서 2등으로 추록되고, 남이의 옥사로 책봉된 익대()공신에서는 1등 및 무령군에 녹훈된 것이다. 공신 명단의 가장 첫 머리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서 세운 그의 공로에 대한 평가를 웅변한다(예종 즉위년 10월 24ㆍ27ㆍ28ㆍ30일).

이제 유자광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때부터 성종 8년(1477) 무렵까지 그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면서 조정의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성종 7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중단을 한명회가 반대하자 즉각 탄핵한 것은 유자광의 견고한 지위와 기민한 정치적 판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성종 7년 2월 19일). 그는 이듬해 도총관()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성종 8년 윤2월 27일).

 

정여립

정여립(, 1546∼1589)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렇게 된 핵심적 원인은 그가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 1589, 선조 22년)를 불러온 장본인이었지만,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결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고, 자는 인백()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 죽도()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그 뒤 여러 하위직을 거쳐 37세 때(1583) 예조좌랑(정6품)이 되었고, 이듬해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올랐다.

이때까지는 흠잡을 데 없는 순탄한 출세였다. 무엇보다도 정여립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이(, 1536~1584)와 성혼(, 1535~1598)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인(西)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정여립의 운명을 결정지은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에 일어났다.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파견했다. 정여립은 변숭복에게서 제자 조구()가 자백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 죽도로 도망쳤다가 자결했다. 그러나 같이 피신했던 아들 정옥남()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이 주모자고, 해서 출신 김세겸()ㆍ박연령ㆍ이기()ㆍ이광수()ㆍ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옥사는 계속 확대되었다. 동인의 영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그의 형제와 노모 ㆍ자식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호남의 대표적인 처사()였던 최영경(, 1529∼1590)은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그 뒤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대규모의 희생을 겪으면서 동인과 서인은 화해할 수 없이 결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역모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조작설로는 당시 서인의 참모로 활동한 송익필()은 신분이 비천했는데(할머니가 천첩의 소생이었다) 동인이 자신의 친족을 노비로 환천(- 양인이 된 천민을 다시 천민으로 되돌림)시키려고 하자 옥사를 조작해 보복했다는 견해와 위관(- 사건의 추국과 판결을 맡은 책임자)인 정철()이 옥사를 확대시켰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이 다소 무리하게 전개된 측면은 인정되지만, 정여립이 선양()에 따른 왕위계승이나 “목자(, )가 멸망하고 전읍(, )이 흥기할 것”이라는 도참설을 주장한 측면 등으로 볼 때 역모가 사실이었다는 반론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최근에는 왕권을 중시하는 시각이 확산되면서 기축옥사(특히 숙청의 확대)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국왕인 선조였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위관이었던 정철은 옥사 발발 이후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가 실각되고, 사건의 주요 쟁점마다 국왕이 깊숙이 개입해 흐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다는 측면 등을 고려할 때 신중히 검토해 볼만한 의미 있는 견해로 생각된다.

아무튼 정여립은 43세의 젊은 나이로 불운한 인생을 마쳤고, 그를 매개로 발발한 기축옥사는 조선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는 날카로운 경구처럼, 거대한 사건일수록 그 실체는 복잡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주관을 최대한 걷어내고 사실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 조금이나마 더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정여립과 기축옥사는 한국사 연구에서 그런 주제의 하나다.

김자점

김자점[ ] 1588 ~ 1651 조선 중기의 문신. 이귀 등과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본관 안동. 자 성지(). 호 낙서(西). 성혼()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서()로 벼슬길에 나아가 광해군대()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적보다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이 병약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연줄을 대었던 것이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급한 성격과 다혈질의 기질로 순검사(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1625년(인조 3년) 윤인발의 딸을 동궁비로 간택하려는데 역적의 자손이라 불가하다고 간언하자 삭탈관직시켜 버렸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권에 적임자가 없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묘호란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고 서북쪽을 방어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강화도에 위리안치() 유배에 처해졌으나, 1년 만에 해배()되었다. 1640년(인조 18) 1월 강화유수로 제수되었고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였다. 1644년에는 심기원()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645년 소현세자()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부인인 강빈이 역모죄에 몰리게 되었다. 김자점은 강빈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은 급속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사림()의 세력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 이형장()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아들 김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이완용

이완용(1858 ~ 1926)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네이버 지식백과]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 이씨이다. 부친은 이호석()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로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호준은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13세 때 양주조씨()와 혼인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대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검교()·홍문관 수찬()·동학교수()·해방영군사마()를 역임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 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지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만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씨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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